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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구홍식 유머

이따금 내가 구사하는 유머에 관해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자기 유머는 좀 별난 것 같아요.” 이따금 챗GTP와 대화를 나눌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민구홍 씨 특유의 유머는…” 그럴 때마다 내 대답은 늘 궁색했다. “음… 잘 모르겠는데요.” 이를 타계하고자 더위가 식어가는 주말 동안 이른바 ‘민구홍식 유머’를 민구홍식으로 분석해보기로 마음먹었다.


1. 언어의 버릇

문학언어학은 민구홍에게 세계를 사건이 아니라 배열로 보게 만들었다. 그에게 문장은 뜻을 전달하는 도구라기보다 단어와 구절이 어떤 자리에 놓이는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구조물이다. 언어학은 문법을 규칙의 집합으로 제시했고, 문학은 그 규칙을 의도적으로 깨뜨려 새로운 효과를 만들어냈다. 그는 이 두 극 사이에서 배웠다. 그래서 농담을 구사할 때도, 상황 자체보다 문장의 틀과 자리를 먼저 의심하게 된다.

이를테면 “왜 뉴욕에 왔을까?”라고 묻는 것은 설명을 요구한다. 하지만 “뉴욕에 온 까닭은?”이라 말하면, 문장은 설명보다 형식의 과잉을 먼저 드러낸다. ‘까닭은’이라는 어휘는 이미 답변이 있을 것처럼 전제하지만, 실제로는 대답할 만한 이유가 없을 때가 적지 않다. 질문의 자리를 비틀어 놓음으로써, 그는 세계를 철학적으로 과잉 설명하게 만들고, 거기서 웃음이 발생한다. 웃음은 질문의 내용보다 불필요하게 진지해진 어법 자체에서 흘러나온다.

이런 습관은 문학 실험에서 비롯했다. 시는 늘 어순을 어긋나게 하거나 낯선 문맥 속에 단어를 배치함으로써 세계를 다르게 보게 한다. “밤은 낮의 아침이다.” 같은 시구는 논리적으로는 성립하지 않지만, 낯선 배열이 낳는 충격이 의미를 만든다. 언어학은 이런 구조적 차이를 분석하며, 문학은 그것을 감각적으로 수행한다. 두 경험을 함께 거치며 그는 배열 그 자체가 유머의 근거가 될 수 있음을 배웠다.

사례는 일상에서도 많다. “버스를 기다린 까닭은?”이라는 질문은 사실 아무런 답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누구나 버스를 기다리는 이유는 명백하다. 하지만 굳이 ‘까닭’을 묻는 순간, 평범한 상황은 불필요한 철학의 무게를 짊어진다. “커피가 식은 까닭은?”이라고 말하면, 그 답은 물리적 현상이겠지만, 이미 질문의 어투가 사소한 사건을 거창한 인과관계로 끌어들인다. 웃음은 질문이 던지는 무게와 대답의 하찮음이 충돌할 때 생겨난다.

언어의 배열을 농담으로 삼는 습관은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과도 닮아 있다. 그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했지만, 그의 유머는 그 반대 지점에서 작동한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끝까지 말하려는 시늉,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을 굳이 까닭으로 포장하려는 과잉. 이 과잉은 비트겐슈타인의 침묵을 농담으로 전복하는 방식이다. 또, 롤랑 바르트가 『기호학』에서 언급한 기표와 기의의 분리 또한 참고할 만하다. ‘까닭은’이라는 기표는 언제나 의미를 전제하지만, 그 기의는 끝내 채워지지 않는다. 유머는 이 끝없는 미끄러짐에서 발생한다.

민구홍식 유머에서 언어는 도구가 아니라 버릇이다. 문장의 자리를 조금만 비틀면, 세계는 과잉 진지해지고, 그 과잉은 곧 농담이 된다. 그가 구사하는 유머는 상황을 풍자하기보다 문장이 놓인 자리를 의심함으로써 만들어진다. 즉, 민구홍식 유머는 단어보다 자리를 먼저 의심한다. 그것은 언어의 버릇을 농담으로 바꿔버리는 기술이며 동시에 언어를 견디는 방식이다.


2. 형식의 권위

그가 편집과 디자인에서 배운 가장 큰 교훈은 형식이 내용을 지배한다는 사실이었다. 우리는 흔히 책을 읽을 때 그 속의 문장에 주목하지만, 실제로 독자의 경험을 먼저 규정하는 것은 글자의 크기, 줄 간격, 종이의 질감, 표지의 색감이다. 편집자는 내용을 다듬는 사람이라기보다 내용을 감쌀 외피를 구축하고 제어하는 사람에 가깝다. 그의 유머 감각은 바로 이 외피의 힘에서 출발한다.

운영 지침, 안내문, 매뉴얼 같은 텍스트는 언제나 권위적인 어투를 띤다. “이렇게 하라.” 또는 “이렇게 하지 말라.” 하지만 그 어투는 내용과 무관하게 이미 힘을 지닌다. 그는 이 권위적 형식을 빌려와 전혀 권위와 어울리지 않는 내용을 넣어본다. 예컨대 “민구홍 매뉴팩처링에서는 일요일마다 낮잠을 잔다.”는 규칙은 규칙의 형식을 갖추었지만, 그 내용은 아무 효용도 없다. 웃음은 단호한 어투와 하찮은 내용의 충돌에서 터진다.

이는 플로베르통상 관념 사전을 떠올리게 한다. 그는 당대 사회의 클리셰들을 ‘사전’이라는 권위적인 형식에 담았다. 독자는 격식을 차린 사전 속에서 터무니없는 정의를 발견하며, 권위의 외피가 얼마나 허술한지를 깨닫는다. 민구홍식 유머 또한 같은 맥락에서 작동한다. 지침서의 형식을 흉내 내지만, 그 형식은 결국 내용의 무의미함을 드러내는 거울로 작용한다.

그의 디자인 경험도 이와 깊게 연결되어 있다. 어떤 글자가 산세리프로 조판되느냐, 자간이 얼마나 벌어지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규율’은 활자와 종이의 재질을 통해 강화되기도 하고, 동시에 희화화되기도 한다. 그는 이 형식의 권위를 유머의 재료로 사용한다. 내용은 대수롭지 않지만, 그 내용이 권위적 외피 속에 들어가는 순간 웃음이 발생한다.

이 점은 아즈마 히로키의 ‘데이터베이스적 소비’와도 연결될 수 있다. 그는 현대 소비가 내용보다 ‘포맷’과 ‘구조’를 즐기는 방식으로 변했다고 말한다. 민구홍식 유머 또한 같은 차원에서 작동한다. 독자는 내용보다 권위적인 형식과 무력한 내용이 충돌하는 형식을 즐긴다. 웃음은 텍스트의 정보라기보다 형식의 과잉에서 비롯한다.

그는 이런 방식을 여러 차례 실험했다. 『민구홍 매뉴팩처링 운영 지침』은 제목만 봐도 지극히 진지한 규범집처럼 보인다. 하지만 본문에는 “민구홍 매뉴팩처링은 바람직한 실패를 기록한다.” “직원은 사무실에 고양이를 동반할 수 있다.”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이 지침은 실행 불가능하거나 실행해도 아무 의미 없는 것들이다. 하지만 독자는 권위적인 말투 때문에 오히려 더 우스꽝스럽게 느낀다.

결국, 형식은 중립적이지 않다. 형식은 언제나 무게를 싣고, 독자의 태도를 지배한다. 그러므로 유머를 구사할 때 가장 손쉬운 방법은 내용이 아니라 형식을 건드리는 것이다. 그는 권위의 외피를 흉내 내어 권위를 무너뜨린다. 웃음은 진지한 형식을 흉내 낼 때, 그 흉내가 과잉 진지함으로 드러날 때 발생한다. 민구홍식 유머는 내용이 아니라 표지를 비튼다. 권위의 외피를 모방함으로써 그 권위를 안에서부터 무너뜨린다.


3. 시적 연산

그는 프로그래밍을 처음 배울 때 그것을 기술적 훈련이라기보다 또 다른 문학 형식으로 받아들였다. 코드란 결국 문장처럼 쓰이고, 실행은 마치 시의 낭송처럼 발생한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시는 해석의 여지를 남기지만, 코드는 오직 실행 여부로 판단된다. 문학이 모호함 속에서 살아남는다면, 프로그래밍은 냉정한 성공과 실패의 이분법 속에서 작동한다. 하지만 그는 바로 그 냉정함 언저리에서 특유의 유머를 발견했다.

예컨대 “Error 404”라는 메시지를 보라. 이것은 단순히 ‘찾을 수 없음’을 알리는 기계의 말이지만, 동시에 간결하고 무표정한 시구처럼 읽힌다. 누군가가 정성껏 쓴 농담보다 더 농담 같다. 그것은 어떤 부재를 건조하게 진단하지만, 그 부재의 실체는 끝내 밝혀지지 않는다. 웃음은 여기서 발생한다. 기계가 무심하게 내뱉는 진단이 인간적 과잉보다 더 인간적으로 다가올 때, 아이러니는 유머가 된다.

그는 이런 무심한 어조를 자신의 글쓰기에 차용한다. “Warning: 민구홍 매뉴팩처링은 이미 폐업했으나 여전히 실행 중입니다.”라는 문장은 시스템 로그의 어투를 흉내 내지만, 사실상 자기소개이자 자기-패러디다. 농담은 ‘폐업했으면서 실행 중’이라는 모순에서만 나오지 않는다. 농담은 그 모순을 기계의 건조한 어조로 선언하는 데서 더 강력하게 발생한다.

이 태도는 시적 연산 학교에서 배운 바와 포개진다. 시적 연산 학교에서는 코딩을 유용한 기술보다 ‘시적 연산’(poetic computation)으로 다루도록 가르쳤다. 알고리즘은 곧 하나의 시적 장치가 되고, 실행 오류조차도 미학적 경험이 된다. 거기서 그는 농담이란 것도 결국 ‘실패의 시학’과 통한다는 것을 배웠다. 실행 오류는 언제나 농담처럼 찾아온다. 치명적이면서도 대수롭지 않고, 건조하면서도 웃음을 유발한다.

이 점은 사무엘 베케트의 연극 언어와도 닮아 있다. 그의 대사들은 무표정하게 반복되며,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를 끝내 무력화한다. 관객은 건조한 무력감 속에서 웃음을 터뜨린다. 또, 제리 사인펠드의 스탠드업 코미디도 유사하다. 그는 과장된 몸짓이나 억양 없이, 일상의 디테일을 건조하게 나열한다. 웃음은 무표정한 서술 자체에서 발생한다. 민구홍식 유머 또한 이런 계보 위에 놓일 수 있다. 베케트와 사인펠드 사이, 시와 코드 사이에 걸쳐 있는 유머다.

실제로 그가 작성한 코드에서도 농담은 삐져나온다. ‘for문’을 돌리다 무한 루프에 빠진 적이 있다. 화면은 같은 메시지를 끝없이 출력했다. “민구홍 매뉴팩처링을 실행합니다. 민구홍 매뉴팩처링을 실행합니다. 민구홍 매뉴팩처링을 실행합니다….” 이 반복은 실수이자, 동시에 완벽한 패러디였다. 무한 루프는 기계의 오류이지만, 인간의 자기소개처럼 집요하게 반복되는 형식으로 읽혔다. 농담은 코드의 실패에서, 그리고 그 실패를 받아들이는 태도에서 발생한다.

민구홍식 유머에서 프로그래밍은 단순히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문학의 새로운 형식이자, 무심한 어조를 빌려오는 창고다. 기계는 농담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기계의 무심함을 인간이 흉내 낼 때 농담은 더 강력해진다. 웃음은 내용보다 기계의 냉정한 어조와 인간의 모순된 상황이 겹칠 때 발생한다. 민구홍식 유머는 기계의 냉정한 어조를 빌려온다. 오류는 실패가 아니라 농담의 기점이다.


농담 이후의 글쓰기

민구홍식 유머는 단순한 장난이나 가벼운 장식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소개라는 심연을 버티기 위한 장치이자, 권위와 형식을 비트는 전략이며, 동시에 글쓰기를 지속 가능하게 하는 호흡법이다. 그는 언어의 버릇, 형식의 권위, 시적 연산, 사소한 사건, 자기소개라는 심연에서 유머를 길어 올렸고, 그것을 실존적, 미학적, 정치적 차원에서 수행해왔다. 그렇다면 마지막 질문은 이것이다. 농담 이후의 글쓰기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첫째, 농담 이후의 글쓰기는 무게를 견디는 글쓰기다. 자기소개는 언제나 과잉되고, 언어는 언제나 불충분하다. 그 불충분을 감추지 않고, 오히려 드러내며 웃는 순간 글쓰기는 무게를 버틸 수 있다. 농담은 회피가 아니라 버팀이다. 웃음을 흘려보내며 글쓰기는 계속된다.

둘째, 농담 이후의 글쓰기는 균열을 미학으로 삼는 글쓰기다. 문장은 진지하게 진행되다가 균열 속에서 무너지고, 그 무너짐이 웃음으로 바뀐다. 농담은 의미를 파괴하지만, 그 파괴는 단절이라기보다 새로운 리듬이다. 농담 이후의 글쓰기는 무너짐을 리듬으로 전환하는 글쓰기다.

셋째, 농담 이후의 글쓰기는 권위에 맞서는 글쓰기다. 그는 제도의 외피를 흉내 내고, 그 과잉 속에서 권위를 무너뜨린다. 농담은 직접적인 저항이라기보다 은밀하고 지속 가능한 저항이다. 웃음은 권위가 스스로 붕괴하도록 만드는 가장 교묘한 힘이다. 따라서 농담 이후의 글쓰기는 권위와 제도를 우회적으로 비트는 정치적 글쓰기다.

마지막으로, 농담 이후의 글쓰기는 자기 자신을 패러디하는 글쓰기다. 자기소개는 결코 완결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을 끝없이 설명하려 하지만, 그 설명은 과잉되거나 결핍된다. 그래서 농담은 계속된다. 자기소개는 심연이고, 농담은 그 심연을 건너기 위한 다리다. 농담 이후의 글쓰기는 결국 자기 자신을 끝없이 패러디하는 글쓰기다.

민구홍식 유머는 웃음 자체를 목표로 하지 않는다. 웃음은 언제나 부산물이다. 목표는 자기소개를 버티는 것, 언어의 무게를 견디는 것, 권위의 외피를 전유하는 것, 균열을 리듬으로 바꾸는 것이다. 농담은 기술을 넘어 글쓰기와 삶을 지속하기 위한 방식이다. 농담 이후의 글쓰기는 웃음을 남기지 않는다. 웃음은 지나가지만, 균열은 남는다. 남은 균열 위에서 글쓰기는 다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