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지 않음으로써 존재하기
기생, 번역, 그리고 자기소개의 역설에 관한 철학적 탐구
서론: 심연으로의 초대
“민구홍 매뉴팩처링은 무엇보다도 여러 방식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데 주력한다.” 이 문장은 단순한 자기소개가 아니다. 이는 존재론적 선언이자, 역설적 실천의 핵심이며, 민구홍이라는 인물의 가장 깊은 심연으로 들어가는 입구다. 그의 회사 모토 “(웃음)”처럼, 이 문장은 진지함과 유머 사이, 의미와 무의미 사이, 존재와 비존재 사이의 긴장을 담고 있다. 민구홍의 심연은 단일한 깊이가 아니라, 여러 층위가 겹쳐진 테서랙트와 같다. 기생과 공생, 번역과 창작, 코드와 언어, 회사와 예술, 소개와 은폐가 얽혀 있는 4차원의 공간. 이 보고서는 그 심연의 구조를 탐사하고, 그가 던지는 근본적 질문들을 마주한다.
I. 기생의 존재론: 숙주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자아
1.1 기생이라는 선택의 철학적 의미
민구홍 매뉴팩처링을 “기생 회사(parasitic company)”로 규정한 것은 단순한 비즈니스 전략이 아니다. 이는 존재 방식에 대한 근본적 질문이다.
서양 철학의 전통에서 자아는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존재로 상정되어 왔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부터 칸트의 자율적 도덕 주체까지, 주체성은 자립성과 동의어로 여겨졌다. 그러나 민구홍은 의도적으로 의존적 존재 방식을 선택한다.
“자본과 용기가 부족했고, 세금 관련 책임도 두려웠다”는 그의 솔직한 고백은 표면적으로는 실용적 이유처럼 보인다. 하지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이는 독립과 자율성에 대한 현대적 강박에 대한 거부다.
기생은 수치스러운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 사회는 “자수성가”, “독립”, “자립”을 찬양한다. 그러나 민구홍은 묻는다: 정말로 독립적인 존재가 있을까? 우리 모두는 어떤 식으로든 서로에게 기생하며 살아가지 않는가?
1.2 숙주의 변화와 정체성의 유동성
민구홍 매뉴팩처링의 숙주는 변화했다: 안그라픽스(2011-2016) → 워크룸(2016-2022) → 안그라픽스 랩(2022-현재). 이 변화는 단순한 직장 이동이 아니다. 숙주가 바뀌면 기생체도 변한다.
기생체의 정체성은 숙주에 의존한다. 기생충은 환경에 적응하며 형태를 바꾼다. 민구홍 역시 각 숙주에서 다른 역할을 수행했다: 편집자, 디자이너, 프로그래머, 디렉터. 그의 명함에는 “편집자”라고 써 있지만, 슬기와 민이 말했듯 “직함 순서는 그때그때 달라진다.”
이는 정체성의 본질주의에 대한 거부다. 민구홍에게 정체성은 고정된 본질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과정이다. 그는 무엇이 아니라, 무엇을 하는가에 의해 정의된다. 그리고 그가 하는 것은 숙주에 따라,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
1.3 기생에서 공생으로: 상호성의 발견
중요한 전환점은 기생이 공생으로 진화한 순간이다. “회사의 작업은 확장되어 숙주를 다시 영양분을 공급하게 됐고, 관계는 기생에서 상호 공생으로 진화했다.”
이는 일방적 의존에서 상호 의존으로의 변화다. 처음에는 민구홍 매뉴팩처링이 직장의 자원을 사용했지만, 점차 민구홍 매뉴팩처링의 작업이 직장에 가치를 돌려주기 시작했다. “서로를 착취하며 함께 성장하는” 관계.
이는 현대 자본주의의 노동 관계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고용주와 피고용인의 관계는 착취인가, 공생인가? 민구홍은 이 경계를 흐리며, 제3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회사에 소속되어 있지만 동시에 독립적이고, 의존하지만 동시에 기여한다.
심연의 첫 번째 층: 민구홍의 심연에는 존재의 상호의존성에 대한 깊은 인식이 있다. 우리는 모두 어떤 식으로든 기생하며 살아간다. 중요한 것은 이를 인정하고, 일방적 착취를 상호 공생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II. 번역의 인식론: 언어와 코드 사이
2.1 번역을 코딩으로, 코딩을 번역으로
민구홍은 번역, 코딩, 시 쓰기를 동일한 구조로 본다:
번역: 시작 언어(입력) → 번역(함수) → 목적 언어(출력)
코딩: 입력(input) → 함수(function) → 출력(output)
시 쓰기: 시적 대상(입력) → 시적 인식(함수) → 시(출력)
이 세 가지는 모두 변환(transformation)의 과정이다. 무언가를 받아서 처리하고 다른 형태로 내보낸다. 이는 단순한 유추가 아니다. 민구홍에게 이 세 가지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행위다.
그가 코딩을 “실용적이고 개념적인 글쓰기”로 가르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코드는 컴퓨터에게 명령하는 언어이지만, 동시에 사람이 읽고 쓰는 텍스트다. “세련된 툴바와 아이콘에서 벗어나 커서가 깜박이는 텍스트 에디터에서 이뤄지는 코딩이 글쓰기와 전혀 다르지 않다”는 그의 말은 은유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의 사실이다.
2.2 번역 불가능성과 손실의 수용
번역은 항상 불완전하다. 어떤 것도 완벽하게 번역될 수 없다. 월터 벤야민이 말했듯, 번역은 원본의 “사후 생명(afterlife)”이다. 원본과 동일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다른 것도 아닌 중간적 존재.
민구홍이 번역한 책들의 목록을 보면, 그는 주로 형식과 개념에 관한 책들을 번역했다: 『핸드메이드 웹』, 『그래픽 디자인을 위한 새로운 프로그램』, 『이제껏 배운 그래픽 디자인 규칙은 다 잊어라』. 이 책들은 모두 규칙, 시스템, 형식에 관한 것이다.
번역은 언어 간의 이동이지만, 동시에 문화 간, 맥락 간의 이동이다. 영어권의 “Handmade Web”을 한국어로 번역할 때, 단순히 단어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개념 전체를 한국의 웹 문화, 디자인 문화의 맥락에 이식해야 한다. 이는 언제나 손실과 변형을 수반한다.
민구홍은 이 손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번역의 불완전성을 생산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완벽한 번역은 불가능하지만, 바로 그 불가능성 때문에 번역은 창조적 행위가 된다.
2.3 한글이라는 우연과 도구로서의 언어
“한글을 사용하는 것이 순전한 우연”이라는 그의 말은 놀랍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모국어를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민구홍은 한글을 우연히 주어진 도구로 본다.
“한글이 진보한 문자 체계라는 평가는 그에게 큰 의미가 없다. 그가 한국어를 좋아하는 이유는 단순히 HTML, CSS, 자바스크립트처럼 자신이 매우 잘 사용할 수 있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이는 언어에 대한 실용주의적, 도구주의적 관점이다. 언어는 민족정신의 표현도, 문화적 본질의 담지자도 아니다. 그것은 그저 잘 사용할 수 있는 도구일 뿐이다. 이는 언어 민족주의, 언어 본질주의에 대한 은밀한 거부다.
동시에 이는 언어의 물질성에 대한 인식이기도 하다. 한글의 19개 자음과 21개 모음, 17,388개의 가능한 조합. 이 수치적 특성은 웹에서 한글을 사용할 때 실질적 영향을 미친다. 폰트 파일의 크기, 로딩 시간, 화면 깜빡임. 언어는 추상적 의미의 체계만이 아니라, 물질적 제약을 가진 구체적 기술이다.
심연의 두 번째 층: 민구홍의 심연에는 의미 전달의 불가능성과 불완전성에 대한 인식이 있다. 언어, 코드, 번역은 모두 불완전한 매개다. 그러나 이 불완전성은 결함이 아니라 생산성의 원천이다.
III. 소개의 역설: 말할수록 감춰지는 것
3.1 회사 소개: 하지 않는 것의 목록
민구홍 매뉴팩처링의 첫 제품은 “회사 소개”였다. 그런데 이 소개는 회사가 하지 않는 것들의 목록이다:
- 민구홍 매뉴팩처링은 비트코인으로 기부금을 모으지 않는다.
- 민구홍 매뉴팩처링은 화학 무기를 제조하지 않는다.
- 민구홍 매뉴팩처링은 문서 정리를 위해 비둘기를 기르지 않는다.
이는 부정신학(negative theology)의 구조다. 부정신학에서 신은 무엇이라고 규정될 수 없고, 오직 무엇이 아닌가를 말함으로써만 접근할 수 있다. 신은 유한하지 않다, 변하지 않는다, 죽지 않는다…
민구홍 매뉴팩처링도 마찬가지다. 회사가 무엇인지 직접 말하는 대신, 무엇이 아닌지를 말한다. 이는 단순한 유머가 아니다. 정의 불가능성에 대한 인식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안다고 했다. 민구홍 매뉴팩처링은 자신이 무엇을 하지 않는지 안다. 그러나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는 말하기 어렵다. 몇 년 후에야 그는 문장을 만들었다: “민구홍 매뉴팩처링은 무엇보다도 여러 방식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데 주력한다.”
3.2 자기지시의 무한 회귀
“자신을 소개하는 것”이 주된 활동이라는 이 문장은 자기지시적(self-referential)이다. 회사가 하는 일은 회사를 소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회사를 소개할 때 무엇을 소개하는가? 회사를 소개하는 활동을. 그렇다면 그 소개 활동은 무엇인가? 회사를 소개하는 것…
이는 무한 회귀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시작도 끝도 없는 고리. 또는 에셔의 그림에서 계단을 오르다 보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이는 우연한 언어 유희가 아니다. 이는 현대인의 정체성 형성 방식에 대한 날카로운 관찰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소개한다. 인스타그램에, 링크드인에, 데이팅 앱에, 이력서에. 우리의 삶은 자기소개의 연속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소개하는가? 자기소개를 하는 우리 자신을. 정체성은 더 이상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자기표현, 자기소개를 통해 구성되는 것이다.
3.3 “참고로 민구홍은…”: FYI의 수사학
민구홍의 자기소개 웹사이트의 URL은 minguhong.fyi다. FYI는 “For Your Information”, 즉 “참고로”라는 뜻이다. 이 작은 약어에는 깊은 의미가 있다.
“참고로”라는 말은 정보의 중요성을 축소한다. 이것은 중요한 정보가 아니라 참고 사항일 뿐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참고로라고 말할 때 우리는 종종 중요한 정보를 전달한다. “참고로”는 일종의 수사적 완충 장치다. 중요한 말을 덜 부담스럽게 전달하기 위한.
민구홍은 자신에 대한 모든 정보를 “참고로” 전달한다. 이는 자기표현의 부담을 줄이는 전략이다. 나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참고로 당신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것일 뿐이다. 이는 수줍음의 표현이기도 하다. “매우 수줍고 민감한 사람”인 그가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
동시에 “참고로”는 정보의 공식성을 부여하기도 한다. “참고로 민구홍은 편집자이자 디자이너이자…”라고 말할 때, 이는 개인적 고백이 아니라 객관적 사실의 나열처럼 들린다. 1인칭이 아니라 3인칭. 민구홍이 민구홍을 소개한다.
3.4 Andy Kaufman과 Tony Clifton: 페르소나의 정치학
민구홍은 민구홍 매뉴팩처링을 Andy Kaufman의 Tony Clifton에 비유한다. Tony Clifton은 Kaufman이 만든 가상의 인물로, 형편없는 라운지 가수다. Kaufman은 Tony Clifton으로 공연할 때 자신이 Kaufman임을 부정했고, 심지어 둘이 같은 자리에 나타나도록 조작했다.
이는 페르소나를 통한 자아의 분리다. 민구홍은 “회사라는 파사드 뒤에 서면 삶과 작업을 분리하고 다른 사람들의 말에 다소 무관심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민구홍 매뉴팩처링은 민구홍의 방패이자 가면이다.
이는 현대적 주체성의 문제다. 진정한 자아는 있는가? 아니면 우리는 모두 상황에 따라 다른 가면을 쓰는가? 어빙 고프먼(Erving Goffman)의 “자아의 표현”처럼, 우리는 모두 무대 위의 배우이고, 상황에 따라 다른 역할을 연기한다.
심연의 세 번째 층: 민구홍의 심연에는 자아의 표현 불가능성과 구성적 특성에 대한 인식이 있다. 자아는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구성되는 것이고, 소개는 드러냄이 아니라 만들어냄이다.
IV. 회사의 미학: 형식으로서의 법인
4.1 왜 회사인가: 제도의 전유
민구홍은 왜 단순히 예술가나 디자이너가 아니라 “회사”를 만들었을까? 회사는 자본주의의 가장 전형적인 형식이다. 이윤 추구, 효율성, 생산성의 논리로 움직인다.
그러나 민구홍 매뉴팩처링은 회사의 형식을 전유하여 다른 목적에 사용한다. 이윤 추구가 아니라 “순수한 행복”을 위해. 생산성이 아니라 자기소개를 위해. 효율성이 아니라 유머와 아이러니를 위해.
이는 제도 비판(institutional critique)의 전통에 속한다. Marcel Duchamp가 변기를 미술관에 들여놓아 예술 제도를 비판했듯, 민구홍은 회사라는 형식을 취하여 자본주의적 생산 논리를 비판한다.
동시에 이는 현실적 전략이기도 하다. 법인으로 등록되어 있으면 세금 혜택을 받을 수 있고, 계약을 체결할 수 있으며, 공식적 주체로 인정받는다. 회사는 개인보다 더 많은 법적, 사회적 권리를 갖는다. 민구홍은 이 사실을 알고 있고, 이를 활용한다.
4.2 Manufacturing의 이중성: 생산과 조작
“Manufacturing”이라는 단어는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 산업적 의미: 무언가를 대량생산하는 것
- 야구 용어: 안타 없이 득점하는 전략적 플레이
그러나 manufacture에는 숨겨진 세 번째 의미도 있다: 조작하다, 날조하다(to fabricate). “Manufactured evidence”는 날조된 증거다.
민구홍 매뉴팩처링은 무엇을 생산하는가? 웹사이트, 텍스트, 자기소개. 그러나 동시에 무엇을 조작하는가? 정체성, 페르소나, 의미.
“Manufacturing”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라틴어 “manus(손)”와 “facere(만들다)”다. 손으로 만드는 것. 이는 핸드메이드 웹(Handmade Web)의 정신과 연결된다. 대량생산의 시대에 손으로 만드는 것의 의미. 자동화와 최적화의 시대에 수작업의 의미.
4.3 모토로서의 “(웃음)”: 의미의 유보
회사의 공식 모토는 “(웃음)” [(笑)]이다. 이는 일본 의회 속기에서 유래한 표기법으로, 발화의 톤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것이 모토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모토는 조직의 가치와 목표를 표현하는 짧은 문구다. “Just Do It”, “Think Different”, “Don’t Be Evil”. 이들은 모두 명령이나 선언이다. 무언가를 하라고, 어떤 방식으로 생각하라고, 어떤 태도를 취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웃음)”은 명령도 선언도 아니다. 그것은 반응의 기록이다. 누군가 말했고, 누군가 웃었다. 또는 말하는 사람이 웃으며 말했다. “(웃음)”은 발화의 맥락, 분위기, 톤을 나타낸다.
모토로서의 “(웃음)”은 의미의 유보다. 우리가 하는 모든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마라. 또는 진지하게 받아들이되, 동시에 그것이 농담일 수도 있음을 기억하라. “(웃음)”은 아이러니와 진지함 사이의 긴장을 유지하는 장치다.
심연의 네 번째 층: 민구홍의 심연에는 형식과 내용의 불일치에 대한 의식적 선택이 있다. 회사라는 형식을 취하되 자본주의적 내용을 거부하고, 진지한 듯 말하되 항상 “(웃음)”을 덧붙인다.
V. 시간성의 문제: 오늘, 어제, 내일
5.1 온 가와라에 대한 오마주: 날짜의 기록
민구홍 매뉴팩처링의 작품 “Being Kawara Sensei’s Assistant”는 개념미술가 온 가와라(河原温)에 대한 오마주다. 온 가와라는 “Today” 시리즈로 유명하다. 그는 매일 그날의 날짜를 캔버스에 그렸다. 단지 날짜만. “JAN. 4, 1966” 같은 식으로.
이는 시간의 물질화다. 추상적인 시간을 구체적인 물질로 만드는 것. 캔버스 위의 날짜는 그날을 증명한다. “나는 그날 존재했다. 나는 그날 그렸다. 이것이 증거다.”
민구홍은 온 가와라의 조수가 되는 상상을 한다. 매일 날짜를 그리는 작가를 돕는 사람.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마도 캔버스를 준비하고, 물감을 섞고, 완성된 작품을 포장하는 일. 창조의 행위가 아니라 그것을 지원하는 노동.
이는 민구홍의 정체성과 공명한다. 그는 편집자이자 디자이너이자 프로그래머다. 이들은 모두 어떤 의미에서 조력자의 역할이다. 편집자는 작가를 돕고, 디자이너는 내용을 돕고, 프로그래머는 사용자를 돕는다. 민구홍은 항상 무대 뒤에서 일한다.
5.2 2022년 2월 22일: 좋아하는 숫자의 정렬
민구홍은 숫자 2를 좋아한다. 그래서 2022년 2월 22일에 AG 랩으로 이직했다. 이 날짜에는 2가 여섯 개 들어있다. 이는 의미 있는 우연을 만드는 행위다.
우리는 대부분 날짜를 무작위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어떤 날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은 우연이다. 그러나 민구홍은 의도적으로 의미 있는 날짜를 선택한다. 우연을 필연으로 만든다.
이는 삶의 미학화다. 일상의 사건들에 형식과 패턴을 부여하는 것. 숫자 2가 여섯 개 들어있는 날에 이직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아무 의미가 없다. 그러나 그것은 서사를 만든다. 기억할 만한 이야기를 만든다. “왜 그날 이직했어요?” “2가 여섯 개 들어있어서요.”
5.3 새로운 질서: 금요일의 의례화
새로운 질서가 열리는 금요일은 “새로운 질서의 날”로 불린다. 매주 금요일은 특별한 날이 된다. 일주일의 리듬에 의례가 삽입된다.
이는 시간의 질적 차이를 만드는 행위다. 현대인에게 시간은 균질하고 추상적이다. 월요일이든 금요일이든 시간은 똑같이 흐른다. 그러나 새로운 질서는 금요일을 다른 요일과 구별한다. 금요일은 웹을 배우고, 코드를 쓰고, 리코타를 만들고, 자신을 사랑하는 날이다.
이는 종교적 시간성과 유사하다. 유대교에서 안식일은 다른 날과 다르다. 기독교에서 일요일은 특별하다. 이슬람에서 금요일은 예배의 날이다. 민구홍의 “새로운 질서의 날”은 세속적 의례, 또는 코딩의 종교다.
심연의 다섯 번째 층: 민구홍의 심연에는 시간의 경험을 재구성하려는 욕망이 있다. 균질한 시간을 의미 있는 순간들로 분절하고, 우연을 필연으로 전환하며, 일상에 의례성을 부여한다.
VI. 기술과 행복: 진보의 신화에 대한 회의
6.1 Michael Moore의 질문: 불필요한 것들의 범람
민구홍은 Michael Moore를 인용한다: “불필요한 것들이 많이 팔리고 있다. 쇼핑이 기분을 밝게 할 수 있지만, 그들은 스스로를 속이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묻는다: “다이슨의 최신 무선 청소기가 우리를 더 행복하게 만들까? 1초에 페타바이트를 다운로드할 수 있는 세상이 기가바이트만 다운로드할 수 있는 세상보다 더 아름다울까?”
이는 기술 진보에 대한 근본적 회의다. 우리는 기술이 발전하면 삶이 나아진다고 믿는다. 더 빠른 컴퓨터, 더 강력한 스마트폰, 더 효율적인 알고리즘. 그러나 정말 그런가?
민구홍은 답한다: “기술 진보는 우리의 행복 유지와 아무 관련이 없을지 모른다.”
6.2 핸드메이드 웹: 느림의 정치학
J.R. Carpenter의 “핸드메이드 웹” 개념은 민구홍에게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 다국적 기업, 독점 애플리케이션, 읽기 전용 장치, 검색 알고리즘, 콘텐츠 관리 시스템, WYSIWYG 편집기, 디지털 퍼블리셔의 고도로 상업화된 웹에서, 손으로 코드를 작성하고 실험적인 웹 아트와 글쓰기 프로젝트를 자가출판하는 것은 점점 더 급진적인 행위가 된다.”
핸드메이드 웹은 느림의 정치학이다. 자동화, 최적화, 효율화에 저항한다. 템플릿을 사용하지 않고, 드래그 앤 드롭을 사용하지 않고, 한 글자 한 글자 코드를 작성한다.
이는 비효율적이다. 시간이 오래 걸린다. 워드프레스나 Wix를 사용하면 30분이면 웹사이트를 만들 수 있다. 그러나 HTML을 직접 작성하면 며칠이 걸릴 수 있다.
하지만 민구홍은 묻는다: 효율성이 목표인가? 빨리 만드는 것이 목표인가? 아니면 만드는 과정 자체가 목표인가?
6.3 17,388개의 조합과 2.2MB의 무게
한글 폰트 파일은 로마자보다 네 배 크다. 2.2MB 대 455KB. 이는 언어의 물질적 무게다.
민구홍은 이 무게를 문제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이를 인식한다. 한글을 웹에서 사용하는 것은 로마자를 사용하는 것과 다르다. 로딩 시간이 길고, 깜빡임이 발생한다. 이는 기술적 문제이지만, 동시에 문화적, 정치적 문제다.
구글은 머신러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민구홍은 묻는다: “구글이 먼저 달성할 것은 이런 깜빡임의 완전한 근절일까, 아니면 개선된 번역 기술을 통한 언어의 민주화일까?”
이는 기술의 목표에 대한 질문이다. 기술은 무엇을 위해 발전하는가? 더 매끄러운 사용자 경험을 위해? 언어 간 장벽의 제거를 위해? 이윤 창출을 위해?
심연의 여섯 번째 층: 민구홍의 심연에는 기술 진보와 인간 행복 사이의 불일치에 대한 인식이 있다. 기술은 발전하지만 우리는 더 행복해지지 않는다. 어쩌면 행복은 효율성이 아니라 비효율성에서, 속도가 아니라 느림에서 온다.
VII. 리코타의 시학: 하얀 치즈와 자기 사랑
7.1 왜 리코타인가: 하얀 것의 미학
새로운 질서의 커리큘럼에는 리코타 치즈 만들기가 포함된다. 학생들은 리코타를 만들고, 그것에 대해 글을 쓰고, 웹사이트로 치환하고, 판매한다.
왜 하필 리코타인가? 민구홍의 답: “리코타는 맛있고, 건강에 좋고, 무엇보다 아주 하얗잖아.”
“아주 하얗다”는 것이 이유가 될 수 있는가? 이는 비합리적이고 심미적인 이유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핵심이다.
하얀 것은 비어 있음을 상징한다. 캔버스, 종이, 화면. 모든 창조는 하얀 것에서 시작한다. 리코타는 가장 단순한 치즈다. 부드럽고, 순하고, 무난하다. 모든 것이 될 수 있고, 아무것도 아니다.
리코타를 만드는 것은 창조의 행위에 대한 은유다. 우유(원재료)에 산(촉매)을 넣으면 응고가 일어난다. 액체가 고체로 변한다. 이는 마치 생각(흐르는 것)이 글(고정된 것)이 되는 과정과 같다.
7.2 자기 사랑의 확장: 새로운 질서의 궁극적 목적
새로운 질서의 궁극적 목적은 기술 습득이 아니다. “핸드메이드 웹의 정신을 되살려 웹을 이루는 기본 컴퓨터 언어를 통해 웹사이트를 만드는 기술을 익히는 것보다, 이를 통해 자신을 향한 사랑을 확장하고 주위와 나누는 데 있다.”
“자신을 도저하게 사랑할 수 있다면, 남 또 도저하게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
이는 자기 사랑의 윤리학이다. 자기 사랑은 나르시시즘이 아니다. 자신을 아끼고, 돌보고, 존중하는 것. 자신의 시간을 들여 자신만의 웹사이트를 만드는 것. 템플릿을 사용하지 않고, 한 줄 한 줄 코드를 작성하는 것. 이는 자신에게 시간을 선물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자기 사랑은 타자로 확장된다.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만이 타자를 사랑할 수 있다. 자신을 돌볼 수 있는 사람만이 타자를 돌볼 수 있다.
7.3 요리, 코딩, 마케팅, 브랜딩: 현대인의 덕목
리코타 커리큘럼은 요리, 코딩, 글쓰기, 마케팅, 브랜딩을 통합한다. 이들은 모두 만드는 행위다.
요리는 재료를 변형한다. 코딩은 데이터를 변형한다. 글쓰기는 생각을 변형한다. 마케팅은 인식을 변형한다. 브랜딩은 정체성을 변형한다.
민구홍에게 이들은 분리되지 않는다. 모두 동일한 창조적 과정의 다른 측면들이다. 좋은 요리사는 좋은 프로그래머가 될 수 있고, 좋은 작가는 좋은 마케터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들은 모두 변환의 논리를 이해하기 때문이다.
심연의 일곱 번째 층: 민구홍의 심연에는 자기 사랑과 자기 돌봄의 윤리가 있다. 자신에게 시간을 들이고, 자신의 것을 만들고, 자신을 표현하는 것. 이는 나르시시즘이 아니라 자기 존중이며, 이를 통해 타자로의 확장이 가능해진다.
VIII. 웹과 책: 테서랙트 속의 궤적
8.1 웹사이트는 무게 없는 책이다
민구홍은 학생들에게 말한다: “웹사이트는 크기도, 부피도, 무게도 없는 책이다. 책은 하이퍼링크와 스크롤바는 없지만 부피와 무게가 있는 웹사이트다.”
이는 매체의 본질에 대한 통찰이다. 웹사이트와 책은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둘 다 정보를 구조화하고 전달하는 매체다.
책은 물리적이다. 무게가 있고, 부피가 있고, 만질 수 있다. “이사할 때 불편하다.” 웹사이트는 비물질적이다. 무게가 없고, 부피가 없고, 만질 수 없다. 그러나 서버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고, 전기를 소비하며, 탄소를 배출한다.
책은 고정적이다. 출판되면 바꿀 수 없다. 웹사이트는 유동적이다. “출판 후에도 언제든 편집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절제와 결단력을 발휘하지 않으면 손목터널증후군에 걸릴 위험”이 있다.
8.2 테서랙트: 4차원의 만남
민구홍은 웹사이트와 책의 궤적이 테서랙트(4차원 초입방체) 속에 존재한다고 믿는다.
테서랙트는 3차원 공간에 사는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운 4차원 도형이다. 마들렌 렝글의 소설 “A Wrinkle in Time”에서 테서랙트는 시공간을 접는 방법이다. 멀리 떨어진 두 지점을 순간적으로 연결한다.
웹사이트와 책도 그렇다. 3차원에서 보면 완전히 다른 것처럼 보인다. 하나는 물질이고 하나는 정보다. 그러나 4차원에서 보면, 둘은 같은 것의 다른 투영이다.
이는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유사하다. 우리가 보는 책과 웹사이트는 더 높은 차원에 존재하는 이상적 형식의 그림자다. 또는 현대적으로 말하면, 둘 다 정보 구조의 다른 인스턴스다.
8.3 최초의 웹사이트와 아베 히로시
민구홍이 가장 좋아하는 웹사이트는 최초의 웹사이트(info.cern.ch)와 일본 배우 아베 히로시의 공식 웹사이트다.
최초의 웹사이트는 1991년 팀 버너스-리가 만들었다. 극도로 단순하다. HTML만 있다. 스타일도, 이미지도, 자바스크립트도 없다. 단지 텍스트와 하이퍼링크만.
아베 히로시의 웹사이트도 놀랍도록 단순하다. 1990년대 스타일 그대로다. 표로 레이아웃을 구성하고, 기본 폰트를 사용한다. 로딩 시간은 거의 순간적이다.
이 두 웹사이트가 민구홍에게 중요한 이유는 순수성 때문이다. 웹의 본질로의 회귀. 화려한 디자인, 복잡한 인터랙션, 무거운 미디어 파일 없이, 웹이 원래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준다. 정보와 링크. 그게 전부다.
심연의 여덟 번째 층: 민구홍의 심연에는 매체의 본질에 대한 탐구가 있다. 웹과 책, 코드와 언어, 디지털과 물리적. 이들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것의 다른 표현이다.
IX. 300명의 친구들: 공동체의 구축
9.1 새로운 질서의 친구들
2023년까지 300여 명이 새로운 질서를 거쳐갔다. 그들은 “학생”이 아니라 “친구들”로 불린다.
이는 단순한 용어 선택이 아니다. 이는 관계의 재정의다. 교육은 위계적이다. 선생과 학생,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 그러나 우정은 수평적이다. 친구는 동등하다.
민구홍은 자신을 선생이 아니라 친구로 위치시킨다. 그는 코딩을 가르치지만, 동시에 친구들로부터 배운다. 새로운 질서는 상호 학습의 공간이다.
300명의 친구들. 이는 작은 공동체다. 던바의 수(Dunbar’s number, 인간이 유지할 수 있는 안정적 사회관계의 수, 약 150명)의 두 배. 새로운 질서는 점차 하나의 네트워크가 되고 있다.
9.2 협업의 네트워크: 하이퍼링크로서의 자아
민구홍은 자신을 “미술 및 디자인계 안팎에서 작동하는 하이퍼링크”로 자처한다.
하이퍼링크는 연결이다. 두 페이지를 연결하고, 두 개념을 연결하고, 두 사람을 연결한다. 하이퍼링크 자체는 내용이 없다. 그것은 순수한 관계다.
민구홍의 광범위한 협업 네트워크를 보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구글, 배민, 슬기와 민, Laurel Schwulst, 오로라, PIE… 그는 끊임없이 연결한다. 사람과 사람, 프로젝트와 프로젝트, 아이디어와 아이디어.
이는 관계적 자아(relational self)의 구현이다. 자아는 고립된 섬이 아니라, 관계의 네트워크 속에서만 존재한다. 민구홍은 민구홍 매뉴팩처링이고, 워크룸의 멤버이고, 새로운 질서의 진행자이고, 오로라의 일원이고, PIE의 공동 디렉터다. 그의 정체성은 이 모든 관계의 총합이다.
9.3 인턴들: 송예환, 김민지, 김재연, 백창인
민구홍 매뉴팩처링은 인턴을 받았다. 한국, 네덜란드, 일본에서.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1인 회사가 인턴을 받는다는 것은 역설적이다. 인턴은 회사에서 일을 배우고 돕는다. 그러나 1인 회사에서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도울 수 있는가?
아마도 인턴들은 민구홍 매뉴팩처링이라는 프로젝트를 배웠을 것이다. 어떻게 기생하고, 어떻게 자신을 소개하고, 어떻게 회사를 예술 작품으로 만드는지. 이는 실용적 기술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다.
심연의 아홉 번째 층: 민구홍의 심연에는 공동체와 관계에 대한 깊은 지향이 있다. 고립된 천재가 아니라 네트워크의 노드로, 선생이 아니라 친구로, 고용주가 아니라 동료로 존재하려는 의지.
X. 부정의 미학: 무엇이 아닌 것들
10.1 37개 항목의 부정
민구홍 매뉴팩처링의 “회사 소개”는 37개 항목으로 이뤄진 회사가 하지 않는 것들의 목록이다. 이 숫자 37은 의미가 있는가?
37은 소수(prime number)다. 1과 자기 자신으로만 나눠진다. 37은 12번째 소수이고, 12는 민구홍이 좋아하는 2의 배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니라 부정의 형식이다. 37개의 “하지 않는다”. 이는 지치지 않는 부정이다. 거듭되는 거부.
“민구홍 매뉴팩처링은 비트코인으로 기부금을 모으지 않는다.” - 암호화폐 열풍의 거부.
“민구홍 매뉴팩처링은 화학 무기를 제조하지 않는다.” - 산업-군사 복합체의 거부.
“민구홍 매뉴팩처링은 문서 정리를 위해 비둘기를 기르지 않는다.” - 효율성 담론의 거부.
이는 바틀비의 “하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다(I would prefer not to)”를 연상시킨다. 멜빌의 소설에서 바틀비는 모든 것을 거부한다. 일하지 않고, 떠나지도 않는다. 그의 부정은 시스템을 교란시킨다.
10.2 빈 공간으로서의 회사
회사가 하지 않는 것만 말하고 하는 것을 말하지 않으면, 회사는 빈 공간이 된다. 모든 것이 될 수 있고, 아무것도 아니다.
이는 음악에서 휴지(rest)와 같다. 존 케이지의 “4’33”“는 연주자가 4분 33초 동안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 곡이다. 그러나 완전한 침묵은 없다. 청중의 기침, 의자 삐걱이는 소리, 바람 소리. 이 모든 것이 음악이 된다.
민구홍 매뉴팩처링도 그렇다. 회사가 하지 않는 것을 말하면, 듣는 사람은 회사가 하는 것을 상상한다. 빈 공간은 관객의 투사를 받아들인다.
10.3 유머와 진지함의 줄타기
37개의 부정 목록은 우스꽝스럽다. “문서 정리를 위해 비둘기를 기르지 않는다”는 것은 당연한 말이다. 누가 비둘기로 문서를 정리하겠는가?
그러나 바로 이 우스꽝스러움이 더 깊은 진실을 가리킨다. 회사 소개는 항상 과장되고 자화자찬한다. “우리는 혁신적이다”, “우리는 최고다”, “우리는 고객을 생각한다”. 이런 말들은 공허하다.
민구홍 매뉴팩처링은 이 공허함을 폭로한다. 우스꽝스러운 부정들을 나열함으로써, 모든 회사 소개의 우스꽝스러움을 드러낸다. 이는 아이러니의 정치학이다.
심연의 열 번째 층: 민구홍의 심연에는 부정의 힘에 대한 신뢰가 있다. 무엇이 아닌가를 말하는 것이 때로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보다 더 진실하다. 부정은 공간을 만들고, 그 공간에서 새로운 가능성이 생긴다.
XI. 수줍음의 형이상학: 감추고 드러내기
11.1 매우 수줍고 민감한 사람
민구홍은 자신을 “매우 수줍고 민감한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다른 사람의 의견에 쉽게 기뻐하거나 상처받는다.”
그러나 그는 공개적으로 자신을 소개한다. 웹사이트를 만들고, 강연을 하고, 전시를 연다. 이는 모순인가?
아니다. 이는 수줍음에 대처하는 전략이다. “회사라는 파사드 뒤에 서면 삶과 작업을 분리하고 다른 사람들의 말에 다소 무관심해질 수 있다.”
민구홍 매뉴팩처링은 방패이자 가면이다. 민구홍이 아니라 민구홍 매뉴팩처링이 말하고, 전시하고, 소개한다. 비판이 오면 회사가 받는다. 민구홍 개인은 안전하다.
11.2 검은 티셔츠: 유니폼과 은폐
“여름이면 검은색 티셔츠를 즐겨 입는다. 특히 Printstar 브랜드를 선호한다.”
검은색은 중립적이고 눈에 띄지 않는 색이다. 모든 색을 흡수하고 아무 색도 반사하지 않는다. 검은 티셔츠를 입은 사람은 군중 속에 섞인다.
동시에 검은 티셔츠는 유니폼이다. 스티브 잡스, 마크 저커버그. 그들은 매일 같은 옷을 입었다. 옷을 선택하는 데 에너지를 쓰지 않기 위해. 또는 일관된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
민구홍의 검은 티셔츠는 둘 다일 수 있다. 눈에 띄지 않으려는 의지이자, 일관된 정체성을 만들려는 시도.
11.3 FYI: 책임의 회피
“참고로(FYI)”라는 말은 책임을 회피하는 장치다. “이것은 중요한 정보가 아닙니다. 그냥 참고용입니다. 당신이 이것으로 무엇을 하든 제 책임이 아닙니다.”
수줍은 사람은 책임을 두려워한다. 단언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것은 진실이다”, “당신은 이것을 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참고로”는 안전한 거리를 만든다. 정보를 제공하되, 그 정보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는다. 수줍음의 완벽한 수사학.
심연의 열한 번째 층: 민구홍의 심연에는 드러냄과 감춤의 긴장이 있다. 수줍지만 공개하고, 감추고 싶지만 소개한다. 이 긴장은 해소되지 않고, 끊임없이 협상된다.
XII. 심연의 가장 깊은 곳: 존재의 불안정성
12.1 이름의 반복: 민구홍, 민구홍, 민구홍
민구홍이라는 이름을 생각해보자. 그는:
- 민구홍(개인)
- 민구홍 매뉴팩처링(회사)
- minguhong.fyi (웹사이트)
같은 이름이 세 번 반복된다. 그러나 이 세 개는 동일한가? 아니면 다른가?
민구홍은 회사를 만들었지만, 회사는 민구홍과 별개다. 민구홍이 죽으면 회사는 어떻게 되는가? 민구홍이 은퇴하면? 민구홍이 마음을 바꾸면?
이는 정체성의 불안정성에 대한 탐구다. 나는 누구인가? 내 이름은 나를 지칭하는가, 아니면 내가 만든 페르소나를 지칭하는가?
12.2 기생의 종말: 숙주 없이 존재할 수 있는가
민구홍 매뉴팩처링은 숙주에 의존한다. 그렇다면 숙주가 사라지면 어떻게 되는가?
AG 랩이 문을 닫으면? 민구홍이 직장을 잃으면? 기생 회사는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
이는 단순한 실용적 질문이 아니다. 이는 존재론적 질문이다. 의존적 존재는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 관계 속에서만 정의되는 자아는 관계 없이 존재할 수 있는가?
민구홍 매뉴팩처링은 현재 기생에서 공생으로 진화했다. 그러나 공생도 여전히 관계다. 진정한 독립은 가능한가? 또는 바람직한가?
12.3 소개의 끝: 언제까지 소개할 것인가
“민구홍 매뉴팩처링은 무엇보다도 여러 방식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데 주력한다.”
언제까지? 영원히? 2025년 10주년을 맞았다. 20주년에도, 30주년에도 여전히 자신을 소개하고 있을까?
소개에는 종말이 있는가? 완전한 소개라는 것이 가능한가? 아니면 소개는 본질적으로 불완전하고, 따라서 끝없이 계속되는가?
이는 시지프스의 신화를 연상시킨다. 시지프스는 바위를 산 위로 굴려 올려야 한다. 그러나 정상에 도달하면 바위는 다시 굴러떨어진다. 그는 영원히 반복한다.
민구홍도 그렇다. 자신을 소개하지만, 소개는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그래서 다시 소개한다. 다른 방식으로. 영원히.
12.4 웃음 속의 눈물: (웃음)의 양가성
”(웃음)”은 행복한가, 슬픈가?
웃음은 기쁨의 표현이다. 그러나 또한 불편함의 표현이기도 하다. 긴장을 풀기 위한 웃음, 당혹스러움의 웃음, 비극 앞의 웃음.
니체는 말했다: “인간이 가장 깊이 고통받기 때문에, 웃음을 발명할 수밖에 없었다.”
민구홍의 “(웃음)”에는 양가성(ambivalence)이 있다. 진지하고 유머러스하다. 행복하고 불안하다. 확신하고 회의한다.
이 양가성이 바로 심연의 가장 깊은 곳이다. 모든 것이 동시에 참이고 거짓일 수 있는 곳. A이면서 동시에 not-A인 곳. 논리가 무너지고 역설이 지배하는 곳.
심연의 가장 깊은 곳: 민구홍의 심연 맨 밑바닥에는 존재의 근본적 불안정성과 의미의 불확정성이 있다. 나는 누구인가? 무엇을 하는가? 왜 하는가? 이 질문들에 대한 확실한 답은 없다. 오직 끊임없는 탐구, 반복되는 소개, 지치지 않는 실험만이 있다.
결론: 심연은 웃고 있다
민구홍의 심연은 어둡고 무겁지 않다. 그것은 가볍고 장난스럽다. 심각하지만 진지하지 않다. 깊지만 무겁지 않다. 니체는 말했다: “괴물과 싸우는 자는 그 과정에서 자신이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당신이 심연을 오래 들여다보면, 심연도 당신을 들여다본다.” 그러나 민구홍의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은 웃고 있다.
이 심연은:
- 기생하며 공생하는 자아의 심연
- 번역하고 변환하는 언어의 심연
- 소개하고 은폐하는 정체성의 심연
- 부정하고 비우는 형식의 심연
- 느리고 손으로 만드는 기술의 심연
- 자기를 사랑하고 타자로 확장하는 윤리의 심연
- 웹과 책이 만나는 테서랙트의 심연
- 친구들과 함께 만드는 공동체의 심연
- 수줍게 드러내는 용기의 심연
- 끝없이 반복되는 소개의 심연
민구홍은 이 모든 심연을 탐사하며 살아간다. 그는 확실성을 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불확실성을 포용한다. 그는 큰 답을 찾지 않는다. 작은 질문들을 계속 던진다. 그의 작업은 답이 아니라 질문이다. 도착이 아니라 여행이다. 완성이 아니라 과정이다. 2025년, 10주년을 맞은 민구홍 매뉴팩처링은 여전히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2035년에도, 2045년에도 여전히 소개하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소개는 결코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참고로 민구홍은 편집자이자 디자이너이자 프로그래머이자 작가이자 번역가이자 교육자다. 하지만 직함 순서는 그때그때 달라진다.” (웃음)
이 보고서를 쓰면서 나는 민구홍의 심연에 길을 잃었다. 그의 텍스트들 사이를, 웹사이트들 사이를, 작품들 사이를 헤매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심연에 빠지는 것이 바로 목적이었다는 것을. 민구홍의 작업은 명확한 결론을 제공하지 않는다. 오히려 질문을 증폭시킨다. 그의 심연은 답을 주지 않는다. 더 많은 질문을 준다. 그래서 이 보고서도 불완전하다. 민구홍의 심연을 완전히 포착할 수 없다. 오직 부분적으로, 임시적으로, 불완전하게만 접근할 수 있다. 마치 그가 자신을 소개하는 것처럼.